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령 가라후토 (문단 편집) == 역사 == [[17세기]] 말 [[러시아 제국]]이 [[태평양]] 진출에 성공한 이후 [[부동항]] 확보를 위한 전초기지로 사할린 섬을 노리고 있었고 [[일본]] 또한 [[에도 막부]] 이래 이 섬을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 섬을 언젠가 영토로 삼기 위해 [[홋카이도]]에 근거지를 둔 마츠마에 번이 1679년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를 시작으로 사할린 남부 해안 거점에 군데군데 어업 중심의 식민지를 설치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와 일본은 각각 섬의 북해안과 남해안에 정착지를 경쟁적으로 건설, 섬의 영유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1855년 맺어진 러일화친조약(시모다 조약) 이후 사할린은 양국의 공동 관할구역으로 편성되어 러시아인과 일본인이 잡거하는 특이한 지역이 되었다. 그 뒤 러일 양국은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을 맺어 우루프 이북의 러시아령 [[쿠릴 열도]] 전도를 일본이 할양받는 대신 사할린은 전역이 러시아 제국의 온전한 영토가 되었다. 전근대에는 물론 근현대까지만 해도 사할린은 중국, 일본, 러시아 그 어디도 큰 가치를 두지 않던 땅이었다.[* 사실 현재에도 지하 자원 창고로서 잠재 가치는 높게 평가받지만 안그래도 러시아 자체가 자원대국이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히 취급되진 않는다.] 사할린은 워낙 기후가 험하고 땅 자체도 경작이 거의 불가능한 불모지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일본은 이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가 남하하기 전까지 별로 손을 대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위협이 현실화되자 부랴부랴 홋카이도와 쿠릴 열도 남부를 완전히 병합하고 사할린에도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해 러시아의 남하를 방어할 전초기지로서 인프라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사실 현실적으로도 당시의 일본의 국력으로는 본토와 더 가깝고 비교적 따뜻한 [[홋카이도]], [[쿠릴 열도]] 관리만으로도 버거웠다. 전통적으로 더위를 피하기 위한 구조로 짜여진 일본식의 가옥과 의복은 가라후토에서는 무용지물이었고, 지금만큼 교통과 운송이 발달한 시절도 아니라서 그때까지도 미개척지에 가까웠던 홋카이도를 사이에 두고 본토와 멀리 떨어진 가라후토에 물자를 보급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일본 정부 내에서도 가라후토 영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기 때문에 1855년 시모다 조약 당시 가라후토는 러시아와의 공동 관리라는 애매한 상태로 임시적인 현상 유지에 만족했고 홋카이도 개발에 더욱 집중했으며 1875년에는 아예 일본령 가라후토와 러시아령 쿠릴 열도를 교환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해 가라후토에서 손을 뗀 바 있다.[* 당시 가라후토보다 가까우면서도 훨씬 쓸모있는 [[홋카이도]]조차 완전히 개척한 지 얼마 안된 시점이라 일본이 가라후토를 관리할 여력이 없었다. 또한 가상적국인 러시아와의 영토 분쟁 소지도 존재해 신생 메이지 정부는 가라후토를 짐짝처럼 여겼으며 홋카이도만으로도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내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실제 가라후토를 쿠릴 열도와 교환한 이유도 비생산적인 가라후토보다 재해권 확보에 용이한 쿠릴 열도의 가치를 높게 보았으며 가상적국인 러시아와 육지 국경 문제를 해소할 수 있었고 또한 상대적으로 중요한 홋카이도 개발에 집중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이 1875년 가라후토를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쿠릴 열도와의 교환이 아닌 사할린 내 러시아와의 파워게임에서 패배해 울며 겨자먹기로 러시아령 쿠릴 열도와 일본의 사할린 주권 절반을 맞바꿔 모양새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이다.] 그 이후 [[러일전쟁]] 뒤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의해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남부는 '''가라후토(樺太)'''[* [[아이누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카무이 '''카르 푸트''' 야 모시르(Kamuy kar put ya mosir)에서 따와 음차했다. 신이 [[아무르 강|강]]의 하구에 만든 섬이라는 의미.]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외지로 편입, [[일본인]]들을 정착시켰다. 1905년 9월 5일 가라후토 민정서를 설립했고, 1907년 3월 15일 [[가라후토청]]으로 개편했다. 조선에서는 [[한국 한자음]]인 '화태도(樺太道)'라 불렸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한 뒤 탄생한 [[소련]]은 당시 사할린 개발에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할린 섬의 석유 개발권을 일본에 양도했다. 일본은 [[러시아 내전]] 당시 러시아령 북사할린(사가렌)을 점령하였으나 오래못가 철수했다. 또한 소련의 [[블라디미르 레닌]]은 사할린 영유를 [[로마노프 왕조]]의 [[제국주의]]에 의한 불법 점유라고 주장했고, 일본에게 사할린 섬 전체를 반환하려고 했지만 결국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5년까지 일본이 지배하였으며 특히 1943년에는 내지로 공식 편입하였지만,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쿠릴 열도랑 더불어 사할린 섬 전체가 [[소련]]의 영토가 되었고[* 소련은 [[홋카이도]] 또한 반분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수립했으나 이는 미국 [[해리 트루먼]]과 [[더글라스 맥아더]]의 완강한 거부로 불발되었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일본에서 발간되는 지도에서는 북위 50도 이하의 가라후토 지역이 어느 나라의 영토로도 표시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 귀속 문제를 보류했는데, 그 직후 [[쿠릴 열도 분쟁]]이 발생하여 영토 관련 협의가 모두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공식 요구는 [[북방영토|남쿠릴 열도 4개 섬]] 반환이고 가라후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는데 이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북쿠릴 열도와 가라후토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조약을 러시아가 조인하지 않아 더이상 일본령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법적으로 러시아령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주장이다.[* 쿠릴 열도를 포기했음에도 일본에서 소위 '북방 영토'라 부르는 4개 섬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는 일본 정부가 이들 섬을 쿠릴 열도가 아닌 홋카이도의 부속 도서로 보기 때문이다. 일본의 입장에 따르면 일본은 쿠릴 열도를 이미 포기했으며 북방 영토는 쿠릴 열도가 아닌 홋카이도 소속이기 때문에 가라후토나 북쿠릴 열도와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극우 세력을 비롯한 일부에선 단순히 남쿠릴 4개 섬을 넘어 [[쿠릴 열도]] 전체와 가라후토까지 환원 요청을 하고 있다. 2차 대전 이전의 영토로 돌아가길 요구하는 것이지만 당연히 현재 실효지배국인 러시아는 물론 일본 정부 역시 이러한 주장을 무시한다. 오히려 구 가라후토의 중심도시이자 현 사할린 최대도시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일본 영사관을 설치해 암묵적으로 러시아 영유를 인정했다. 일본인들은 가라후토의 상실을 아쉬워하지만 이곳에 투자하며 일본의 경제적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